- 작성자 잔투가르XE7 2026-09-06 02:22:272026-09-06 02:22:27
서울은 꽤 이상한 도시입니다.
세계 주요 선진국 대도시들과 비교하면 인구밀도는 굉장히 높은데, 정작 도시의 평균 용적률은 상당히 낮습니다.
쉽게 말해 사람은 엄청나게 많이 모여 사는데 건물은 그만큼 고밀도로 지어져 있지 않습니다. 서울 곳곳에는 아직도 군사정권 시절 지어진 낡은 아파트와 저층 주거지가 남아 있고, 주요 지역의 재개발 계획은 정권과 시장이 바뀔 때마다 엎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결국 문제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만들 것인지 사회적 합의를 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고 봅니다.
그 와중에 진보 정부마다 밀고 있는 주장이 있습니다.
서울은 너무 과밀하니 서울의 기능을 줄이고 지방으로 분산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집값도 비싸고, 지방은 소멸하고 있으니 기업과 공공기관, 대학과 인구를 전국으로 흩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이것이 흔히 이야기하는 국토균형발전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전제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서울의 발전을 막는 것이 정말 지방을 살리고 대한민국 전체를 부유하게 만드는 방법일까요?
도시가 큰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에드워드 글레이저가 『도시의 승리』에서 도시를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까지 표현했습니다.
실제로 인류 문명의 발전을 돌아보면 메소포타미아의 도시에서부터 그리스의 도시국가, 중세와 근대 유럽의 대도시에 이르기까지 철학자, 과학자, 상인과 예술가들이 서로 가까운 곳에 모여 지식과 아이디어를 교환하면서 혁신이 일어났습니다.
현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테크 산업은 실리콘밸리에, 금융산업은 뉴욕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세계적인 기업과 인재가 서로 가까이 모여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집적경제(agglomeration economy)라고 합니다.
사람과 기업이 가까이 모여 있을수록 인재를 찾기 쉽고, 지식이 빨리 전파되고, 기업 간 거래비용이 줄어들며, 새로운 기업과 산업이 만들어질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한국도 이제 과거처럼 저임금 노동력을 이용한 제조업만으로 먹고사는 국가가 아닙니다.
반도체, 배터리, 자동차, IT, AI, 바이오, 금융, 콘텐츠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는 결국 사람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수한 사람들을 전국에 골고루 흩어놓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서로 모으고 연결할 것인가입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기업, 대학, 연구기관, 금융, 문화시설과 대규모 노동시장을 모두 갖춘 곳은 현실적으로 서울 수도권밖에 없습니다.
위 자료에서도 서울 도시권의 GDP는 약 9,267억 달러로 도쿄, 뉴욕, LA, 런던, 파리 다음 수준으로 표시됩니다.
서울은 단순히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도시가 아니라 이미 세계적인 규모의 경제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도시를 어떻게 더 경쟁력 있게 만들지를 고민하기보다, 오랫동안 이 기능을 전국으로 떼어내 분배하는 데 상당한 정책적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도시를 쪼개면 비용이 올라갑니다
인구 1,000만 명이 사는 도시에 지하철 10개 노선을 만드는 것과 인구 100만 명짜리 도시 10곳에 각각 한 개씩 지하철을 만드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도로와 철도뿐 아니라 대형병원, 대학, 공연장, 쇼핑몰, 음식점 같은 시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구가 충분히 많으면 한 지역 안에서 수요가 계속 발생하기 때문에 다양한 서비스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인구가 줄어들면 공연과 전시가 인구에 정확히 비례해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시장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래서 인구감소 시대에는 역설적으로 집적의 필요성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인구가 계속 줄어드는데 전국의 모든 지역에 학교, 병원, 철도, 도로, 문화시설과 행정서비스를 똑같이 유지하려 하면 국민 한 사람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은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수십 년간 추진한 공공기관 지방이전도 한번 평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부부처를 세종으로 보내고 국민연금, 한국전력, 도로공사, 한국거래소 등 여러 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했습니다.
하지만 기관의 주소를 바꾼다고 기존의 업무 네트워크가 동시에 이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울에는 여전히 국회와 주요 기업, 언론, 금융기관과 각종 협력기관이 몰려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종이나 지방기관 사람들은 금요일 오후 서울에서 대면회의를 잡고, 직원들은 매주 KTX를 타고 서울을 왕복하는 풍경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분산시켰는데 서로 만나기 위해 이동하는 시간과 교통량만 늘어난다면, 그것이 정말 효율적인 분산인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서울에 집이 부족하면 집을 더 지으면 됩니다
서울 집중을 반대할 때 가장 강력하게 제기되는 문제가 집값입니다.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 집이 부족하고 집값이 비싸니 더 이상 서울에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집이 부족하면 집을 더 지으면 됩니다.
서울의 평균 용적률은 약 150~170% 수준입니다.
반면 싱가포르 도심은 최대 2,500%, 맨해튼과 홍콩은 1,500%, 런던 도심은 약 550%까지 허용되는 지역이 있습니다.
단기간에 서울을 맨해튼처럼 만들 수는 없을 수도 있죠. 문제는 서울의 주거용 건축물에는 현실적으로 150~200% 정도의 낮은 용적률이 적용되는 곳이 많다는 점입니다. 법적으로 더 높은 용적률이 가능한 경우에도 실제 허가는 제한적이었습니다.
이러한 토지 용도 규제의 뿌리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현재와 비슷한 체계가 형성된 것은 1970년대입니다.
당시 건축기술과 도시구조를 전제로 만들어진 제도를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가 된 21세기 서울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서울의 주거환경 문제를 단순히 사람이 너무 많아서 생긴 문제라고 볼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지역에 충분한 주택을 짓지 못하도록 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서울 한복판이나 강남, 여의도에 고층 건물을 허용하면 사업자가 몰리는 반면, 인구가 없는 지역에 용적률을 아무리 높게 허용해도 아무도 건물을 짓지 않습니다.
결국 수요가 있는 곳은 가격으로 드러납니다.
수요가 존재하는 서울의 토지를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낡은 저층 주택과 아파트를 고밀도로 재개발하면서 도로와 공원 같은 공공공간도 함께 확보하는 편이 주택 문제에 더 직접적인 해법일 수 있습니다.
인터넷이 도시를 대체할 수도 없습니다
이제는 인터넷이 있으니 굳이 사람들이 모여 살 필요가 없다는 반론도 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시기를 지나면서 오히려 그 한계도 드러났습니다.
줌이 있다고 친구와 만나 술을 마시는 일이 사라지지 않았고, 메타버스가 있다고 사람들이 집에서 VR을 쓰고 클럽을 대신하지도 않습니다.
기업에서도 온라인 회의가 정착됐지만 중요한 협업이나 네트워킹을 위해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직접 만납니다.
젊은 사람은 친구와 커뮤니티를 찾아 도시로 가고, 부모는 교육을 찾아 도시로 가며, 고령층은 병원과 생활 인프라를 찾아 도시를 선호합니다.
청년들이 필요한 것은 단순한 일자리 숫자가 아닙니다
한국은 대학진학률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반면 노동시장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중소기업, 자영업과 제조업이 차지합니다.
즉 청년들의 교육 수준과 그들이 원하는 일자리, 실제 산업구조 사이에 미스매치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자리가 전혀 없는 것과, 청년들이 원하는 생산성과 임금 수준의 일자리가 부족한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이를 해결하는 길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청년들에게 눈높이를 낮추고 기존의 저생산성 일자리에 취업하라고 요구하거나,
아니면 혁신과 경쟁을 통해 새로운 삼성, 새로운 하이닉스, 새로운 셀트리온, 새로운 미래에셋 같은 기업이 계속 탄생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저라면 당연히 후자가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기업은 아무 데서나 탄생하지 않습니다.
인재와 대학, 연구기관, 벤처캐피털, 대기업, 전문서비스와 거대한 소비시장이 가까이 붙어 있는 도시에서 탄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람을 지방으로 분산한다고 해서 고생산성 일자리까지 자동으로 분산되지는 않습니다.
인구가 줄어들수록 서울은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1970년대 한국의 경제규모는 지금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작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은 이탈리아나 캐나다에 비견되는 경제규모를 갖게 되었고, 한국 기업들은 일본·독일·대만 기업들과 세계시장에서 경쟁하고 있습니다.
자원도 부족하고 자본도 부족했던 한국이 여기까지 온 가장 중요한 자원은 결국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선택해야 할 길도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전국에 최대한 균등하게 배치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수한 인적자원을 어떻게 더 많이 만들고, 어떻게 더 잘 모으고, 어떻게 서로 연결할 것인가가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대기업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삼성전자와 현대차, SK 같은 기업이 모두 사라졌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임금과 생활수준이 지금보다 높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을 겁니다.
서울도 비슷하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서울이 강해지는 것이 지방을 반드시 약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계적인 기업과 인재, 자본과 문화가 모이는 대도시 하나를 가진 것이 한국 전체가 세계시장에서 경쟁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지방을 버리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부산·대구·대전·광주 같은 경쟁력 있는 광역도시권은 각각의 강점을 중심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서울의 성장을 막아서 지방을 살리겠다는 접근과 각 지역의 경쟁력을 키우겠다는 접근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특히 앞으로 한국의 인구가 빠르게 감소한다면 모든 지역의 현재 인구와 인프라를 그대로 유지하려 하는 것보다 경쟁력 있는 도시권에 인구와 산업을 집적시키는 방향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단순히 노동자의 숫자를 얼마나 유지하느냐보다,
우수한 사람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모으고 연결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울이라는 도시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자산일 수 있습니다.
서울의 발전을 억누르는 대신 더 많은 집을 짓고, 더 좋은 인프라를 만들고, 더 많은 기업과 인재가 모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인구가 줄어든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서울이 살아야 나라가 삽니다.
추신: 가장 진정성 있던 진보 정부조차도 금융 기관을 다 찢어버리려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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